공화국의 자손들
I. 납치자들
당신은 당장 사랑하는 사람 혹은 개 혹은 고양이와 가족 혹은 친지 연인에게
물 냄새가 진동하니
내일은 비가 올 거란 말을 해요
그러면 건물은 언제나 건물인 채로
물을 뒤집어쓰고
당신에게 우산은 언제나 들이닥친 채로
물을 뒤집어쓰고
싸구려 우산을 뒤집어 쓴 채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요, 관성에 가득 찌든 졸린 어투를 지닌 채로,
II. 버스 터미널의 각다귀들
자수성가란 항상 산뜻한 향기를 풍기는 미신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언덕을 넘는다는 싸가지 없는 말을 뱉으면서 배우는 진리는
역사는 항상 쟁취하는 자의 것이라는 것
누구와 쟁爭하고 누구의 것을 취取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평생을 의아해 하며
어쩌면 조금은 몽롱한 상태로
부유浮游하며 살곤 하면
도대체 얼마나
뛰어넘어야 하고
부모는 얼마나 큰 벽이며
세상은 언제까지나 세상일 것이며
비웃는 자들이 언제쯤 정신을 차리며
사랑이 언제쯤 다시 온유할 건지
그러면 우리가 멀쩡할 수 있을 거냐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개 혹은 고양이들이 가족 혹은 친지 연인에게
마음껏 칼을 휘두르며
혀를 내두르며
협박을 하는 겁니다,
III. 저마다의 사연들
서울, 그 특유의 음습함이 있는 동네지요
사실 음습함이 없는 동네는 없어요
음습함은 언제나 음습함인 채로
사람들과 이방인들과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가지가지 방법으로 사랑을 받죠
관심을 받아요
여기저기서 손길을 타곤 합니다 때가 있는 대로 끼곤 해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식과 불가해한 질문들 가령
여기저기서도 음습한 우리가 음습한 응달인 서울에서 무엇을 꺼낼까 누군가
묻거든
다른 건 몰라도 삼라만상參羅萬像 같은 거나 꺼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여기저기의 말투로 말해요
IV. 삼라만상
우린 삼라만상이 뭔지 언제나 의아한 상태로
우리가 삼라만상을 찾았는지 우리는 의아하고
우리가 삼라만상인지도 잘 모르겠고
당신은 그저 미소 같은 미소를 지은 채
삼라만상이고 싶어서 안달인 채
삼라만상으로 남곤 합니다
우리는 삼라만상을 발견하기도 하고 삼라만상을 만들기도 하고 삼라만상이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혹은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삼라만상의 진정한 원리를 찾을 때는 언제나 ‘불현 듯’ ‘갑자기’ ‘어느새’ ‘어쩌다가’ 같은 단어가 붙곤 합니다. 마치 인공지능이 ‘이것은 개다’ 할 때 ‘왜 개일까’가 생략된 것과 같은 겁니다. 고타마 싯다르타 같은 경우에는 ‘말로 할 수 없다! 같은 비겁한 말도 서슴없이 하곤 했죠. 그건 그냥 모르는 건데 말입니다. 어쩌면 우린 모르라고 세상에 던져지며, 평생 동안 의아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시인은 언제나 즐겁고 쉽게 비관하고 통곡합니다. 열정과 확신, 거기서 파생하는 신념은 촌스러운 것인데, 여기는 서울이니 말입니다. 더 나은 것이 뭔지는 잘 모르는데, 삼라만상은 도처에 사려 있어서, 사랑하기도 힘든 익숙한 것이니 말입니다.
환상은 신비를 낳았고, 신비는 음습함을 낳았고, 음습함은 서울을 낳았으며, 서울은 공화국을 낳았고, 공화국은 우리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공화국 당신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아빠
엄마
삼라만상
V. 내다버린 우산
말은 항상 어려운 거에요
쓴다는 건 손목의 일인데
어느새 손가락의 일이 되어버렸죠
물 냄새가 나는 건 확실한데
비는 새벽에 그쳤어요
아침이에요 해는 뜨고 행성은 항성을 공전하고
어젯밤에는 비가 왔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