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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우(潘施優)〉.
김김밥은 주민등록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바뀐 이름이었다. 여자들이 많이 쓰는 이름은 아닌 게 분명했지만, 나름대로 괜찮았다. 이번 기회에 머리도 숏컷으로 자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베풀 시(施) 자를 쓰는구나. 어울리지는 않는 한자다. 걔한테도, 나한테도.
처음 이름이 바뀐 것은 중학생 때였다. 같은 반 윤다영은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똑 떨어지는 단발을 한 여자애였다. 참 자기 이름처럼 생겼다, 고 김김밥은 생각했다.
평범한 이름을 가진 애를 보면 늘 부럽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게 다였다. 자신도 그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우연히 윤다영이 필통 안에 아무렇게나 넣어둔 껌을 하나 가져가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윤다영!”
김김밥은 다음날 조회 시간, 자기 이름이 불리자 왜 윤다영이 대답을 하고 킥킥대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지, 이 예쁜 이름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왜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에도 이름은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다영아, 오늘 영어 숙제했어?”
“윤다, 매점 가자!”
처음에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쁜 이름을 갖는 꿈이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날이면 가끔 꿨었기 때문이다. 어제 집에 가는 길에 동네 꼬마들이 김밥집 앞에서 평소보다 심하게 놀려대긴 했다. 그것도 아니면, 문방구 앞에서 명찰을 주워줬던 잘생긴 오빠의 표정이 순간 변하는 걸 봐버려서 그런가?
꿈이 아니라는 건 금세 분명해졌다. 매일 저녁 아무리 잠들어도 아침이면 엄마는 “다영아, 밥 먹어라!”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늘 이쯤에서 누군가가 산통을 깨듯 진짜 이름을 불러주면 꿈에서 깼었는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효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윤다영, 이라고 박힌다면 괜찮을 것 같아 태어나서 처음 예쁜 이름 스티커를 뽑으러 간 날, 인쇄된 스티커에는 익숙한 세 글자가 도로 박혀 있었다. 꽤 속상해서 밤새 울었었다.
“사기꾼 이름이라서 그런가, 그렇게 좋은 이름은 아니네.”
민자영은 주민등록증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려주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갈 것 같아?”
민자영이 껌을 짝짝 씹으며 물었다.
“한 달? 아님 일 년? 지난번에는 반년이었지?”
김김밥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긴 하다만. 나도 모르겠어.”
주민등록증을 도로 지갑에 넣으면서 김김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보다 너 그 껌 좀 조용히 씹어. 나 트라우마 있다.”
“껌 씹는 재미로 살면서 웬 트라우마.”
민자영은 보란 듯이 턱을 더 바삐 움직였다.
“좀 즐겨. 오랜만에 얻은 행운인데.”
동아리 회장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소개팅이라도 시켜줄까?”
“즐기긴 뭘 즐겨, 지난번에 기억 안 나?”
김김밥은 널브러진 책들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연애는 아무것도 안 속이고 시작하는 게 나아.”
“원래 서로 속고 속이는 게 연애거든.”
민자영이 쏘아붙였다.
“그리고 지난번이라니, 차이지도 않았잖아. 네가 괜히 찔려서 찬 거지.”
김김밥은 말없이 가방을 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간다. 내일 아침 일찍 면접이야.”
민자영은 앉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다시 김밥되기 전에 얼른 철썩 붙어라.”
문을 닫고 나오면서 김김밥은 문 앞에 붙은 삐뚤빼뚤한 글씨를 읽어보았다.
〈작명 동아리 ‘명명’〉.
작명 동아리 회장인 민자영은 사주팔자에는 관심도 없었고 작명소는커녕 점집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목사님네 고명딸이었다. 실은 그저 사전을 뒤적이거나 예쁜 이름 짓는 것을 좋아했을 뿐인데 늘 어느 한쪽이 떨어졌거나 무언가가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다니는 데다가 시커멓게 눈화장을 해서 축제 때면 동아리 부스에 타로점을 보려는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세 번째로 이름이 바뀌기 직전, 김김밥은 적당한 사람을 찾을 요량으로 부스에 줄을 섰다. 성경책에 기반하여 연애점과 취업점을 오십 명쯤 봐주고 난 뒤인지라 민자영은 김김밥의 첫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개명?”
민자영이 되물었다.
“어어, 잘 찾아왔어. 얼른 앉아.”
아무렇게나 뻗친 민자영의 단발 머리가 기쁨으로 흔들렸다.
“이름이 뭔데?”
김김밥은 민자영의 이름이 뭘까 잠깐 생각했다.
“김김밥이요.”
민자영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간 당혹스러움이 천막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뭐?”
“김, 김, 밥.”
김김밥은 천천히 한 자 한 자 다시 불러주었다.
“성씨 김(金) 자 두 번에 밥은 그냥 한글이에요.”
“어어, 그래.”
민자영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드디어 작명다운 작명을 할 수 있었던 게 기뻤던지도 몰랐다. 성경책을 덮고 치워두었던 사전을 펼치는 그녀의 손가락이 다급해졌다.
“어디 보자, 평소에 좋아하는 이름이나 단어 같은 거 있어?”
김김밥은 고개를 내저었다. 김밥이나 만두만 아니면 괜찮았다.
“그냥 무난한 걸로요.”
“순우리말? 아님 한자어? 뭘 더 선호해?”
“상관없어요.”
민자영은 한참을 사전을 뒤적이다가 김김밥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하며 끙끙댔다.
“김아영? 김아라는 어때? 아리따울 아(娿) 자를 써서…. 아님 아예 바다나 사랑같은 건 어때? 김바다, 김사랑……. 성이랑 좀 안 어울리나?”
“아, 성은 상관없어요.”
김김밥이 말했다.
“성이 상관없다고? 혹시 어머니가 재혼하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김김밥은 민자영의 반짝이는 눈빛에 순간 사실대로 털어놓을 뻔했다.
“그냥 재미로… 정해보는 거라서요. 어차피 개명은 못 하거든요.”
민자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부모님이 못 하게 해?”
“뭐… 비슷해요.”
민자영은 김김밥을 한참 쳐다보더니 이내 무릎을 탁, 쳤다.
“이게 좋겠다.”
사전을 덮고 다시 펼친 건 성경책이었다.
“에스더, 김에스더. 어때?”
작명에 재능이 없는 작명 동아리 회장은 연락처를 건네며 반드시 김김밥의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아주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김김밥은 매일 공강 때마다 동방에 붙잡혀 몇 시간씩 민자영이 늘어놓는 온갖 이름들과 씨름해야 했다.
꼬박 한 달을 채우기 며칠 전, 김김밥은 결국 사실을 털어놓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동방은 여전히 들락거리게 됐지만.
“이 풍선껌으로 풍선을 불기만 하면 그 사람이랑 이름이 바뀐다고?”
민자영이 포장지에 쌓인 풍선껌을 마치 새로 학계에 보고된 생물처럼 들여다보았다.
“말이 되냐. 이거 편의점에서 잔뜩 파는데?”
김김밥은 고개를 내저었다.
“벌써 해봤어. 그 아저씨한테서 산 것만 그래. 나한텐 이 한 통이 전부야.”
민자영은 그 말에 풍선껌에서 손을 놓았다.
“이거 얼마나 오래된 거냐. 먹으면 죽는 거 아니야?”
김김밥은 껌을 보관하던 통에 다시 소중하게 넣었다.
“안 죽어. 아직까지 아무도 안 죽었다, 뭐.”
“그럼 개명 얘긴 뭐야?”
민자영이 두 손에 턱을 괸 채 물었다.
“부모님이 못 하게 한다며.”
김김밥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해도 원래대로 돌아가.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두 번째로 이름이 바뀐 다음, 김김밥은 마침내 풍선껌이 그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김김밥의 가족은 20년 동안 살던 집을 팔고 이사를 했다. 김김밥의 가족이 졸업식에 간 사이 묵은 짐들 사이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던 이삿짐센터 아저씨는 우연히 책상 서랍에서 발견한 풍선껌을 무심코 하나 씹은 것이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받고 펼쳐 든 순간, 김김밥은 자신의 이름이 있어야 할 곳에 ‘박지상’이라는 세 글자를 발견하고 담임 선생님께 졸업장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응? 그게 무슨 소리니, 지상아?”
김김밥은 기념사진을 찍는 내내 얼굴도 모르는 아저씨의 이름에 쫓겨 다녔다.
“박지상, 같이 사진 찍자!”
“지상아, 졸업 축하해!”
마침내 부모님이 “우리 지상이, 너무 기특하다.”며 눈물 지었을 때 김김밥은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한 달 동안이나 이름은 그대로였다. 김김밥은 대학 입학식 날까지 이름이 바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좋을지 아닐지 매일 밤 고민했다. 아무렴 박지상이 김김밥보다는 낫다는 결론에 다다른 다음 날, 김김밥은 학원에서 받아든 운전면허증에 찍힌 익숙한 이름을 보고 심한 욕을 내뱉었다.
〈태백산 포장이사〉.
집에서 굴러다니던 명함에서 박지상이라는 이름을 발견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중학생 때 윤다영이 이름이 바뀌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듯, 박지상 또한 이름이 바뀐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풍선껌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라니 뭘 말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날 학생 방에서 풍선껌 같은 걸 먹고 좀 기분이 이상해지긴 했어요. 어릴 때 생각이 나더라고. 학생 그날 고등학교 졸업식이었죠? 이런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날 내가 졸업하는 것처럼 괜히 뿌듯하더라고. 난 중졸이거든.”
김김밥은 다시 김김밥으로 돌아와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다. 하지만 전부 다 돌아온 건 아니었다. 윤다영이라고 이름을 적었던 교과서. 박지상이라고 인쇄된 졸업장. 이름이 바뀐 동안에 일어난 일들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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