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벌써 여덟 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반시우는 머리를 긁으며 책상 위 고지서 더미에 새로 온 독촉장들을 던졌다. 다 쓰러져가는 빌라에서 뭔 관리비를 걷는다는 건지.
컴퓨터 화면 위로 글자가 깜빡였다.
〈반 고흐의 라이브 방송〉.
한숨부터 나왔다.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도 할 이야기가 없었다.
방송에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연이 필요했다. 이대로라면 카메라를 사는데 쓴 돈도 날릴 날이 머지않았다.
반시우의 눈길이 독촉장들과 어지럽게 섞여 있던 광고지에 머물렀다. 편의점 앞에 새로 생긴 분식집 광고지였다.
“나한테도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스스로 뱉은 말에 놀라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뭐 어때. 반 고흐도 인생의 절반을 교회에 미쳐 살았는데.
이건 종교같은 거였다. 사연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사람들이 몰리면 돈이 생길 것이다. 그럼 더 이상 뭐에 쓰는지 알 수도 없는 관리비 같은 건 문제도 아니겠지.
반시우는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늘 입고 다니는 겉옷 주머니 속 꾸깃거리는 껌 종이가 만져졌다. 수신음이 끊기는 순간, 초조하게 껌을 짓이기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왜?
달갑지 않은 목소리다. 하긴, 거짓말을 들킨 뒤로 연락은 처음이었다.
“이 풍선껌, 내가 씹으면 어떻게 돼?”
―무슨 뜻이야?
“너 요즘 취직 준비한다며.”
한참 뒤에야 한 마디가 들렸다.
―그런데?
역시 이게 통할 줄 알았다. 반시우는 급하게 덧붙였다.
“내 이름 예쁘다고 했었잖아. 바꾸고 싶지 않아?”
―너야말로 왜 바꾸고 싶은데?
“…내가 돈이 좀 필요해.”
―돈?
더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다.
“나 인터넷 방송하는 거 알잖아. 거기에서 네 사연을… 자세한 건 됐고, 그냥 빨리 말해. 할 거야, 말 거야?”
반시우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글쎄.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이름이라고. 이내 반시우는 고개를 내젓고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아니야, 대단한 이름은 아니지만 대단한 사연이잖아.
“마지막은 꼭 남겨두고 싶다고 했잖아.”
반시우가 힘을 실어 말했다.
“살면서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다는 희망같은 거라고. 그러니까 네 번째는 나로 해. 가서 면접도 붙고-”
―너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반시우는 마른 침을 삼켰다. 묻기도 참,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을 골라서 묻는다.
―이제와서 따지거나 돌려달라고 할 생각은 없어. 그냥 이해가 안 돼서.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숨기고 싶을 때마다 녀석들은 거기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꼭 티를 냈다.
“…말하면 바꿔 줄 거냐?”
반시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 상황에도 절박하기만 한 기분이 꽤 처참했다.
―글쎄.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고개에 힘을 풀었다.
“부러워서.”
반시우가 말했다. 혀끝에 감도는 언어의 감촉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았다.
“부러워서 그랬다. 네 이름이.”
잠시 대답이 없었다.
시곗바늘이 한 바퀴를 돌아오는 순간, 대답도 왔다.
―좋아.
배에서 무언가 꾸르륵댔다. 배고픈 건지, 화장실이 가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둘 다 배에서 시작되는 일들이니 상관은 없다. 이미 섞여서 알 수도 없게 됐다.
―좋아. 해보자.
전화가 끊어졌다.
깜빡.
깜빡.
〈반 고흐의 라이브 방송〉.
반시우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에 깜빡이는 글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제 정말이 되는 건가?
풍선껌을 입에 넣고 씹는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포장지를 뜯어서, 입에 넣고 씹는다. 천천히, 마른 나무토막 같던 껌 조각이 질겅질겅해진다. 단물이 조금씩 빠질 때까지 입안에서 굴리다 보면 어느새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고무공이 되어간다.
후우우.
후우우우.
입에서 풍선이 튀어나온다. 시야로 불투명한 풍선이 점점 비집고 들어온다. 깜빡거리는 컴퓨터 화면을 가릴 만큼 커졌을 때, 펑하고 풍선이 터졌다.
“아.”
익숙한 글자가 있던 자리에 무언가 낯선 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 것인 줄 알고 한참을 들고 있던 가방 안에서 남의 물건을 꺼내든 기분이었다.
〈김김밥의 라이브 방송〉.
글자가 몇 번이나 깜빡였을까. 그 낯선 문장은 점차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같이 편안해졌다. 반시우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방송이 이토록 설레는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후-하.”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달칵.
방송 시작을 알리는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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